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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에서 교훈을 얻은 행정병의 저녁

[잡일]

  솔직히 병장을 달고나면 진심 할일이 별로 없습니다. 저희 사무실에서는 일병부터 병장 2호봉까지는 일을 해야됩니다. 아침에 나오면 커피 잔 닦고, 간부님 커피 타드리고, 잔소리 좀 듣고, 세절하고, 청소 상태 점검 다하고, 업체분들 인솔 해드리고, 스캔 부탁한거 스킨해드리고, 전화 온거 돌려 드리고, 업무상 지원...아니 '사역'부분 지원하고 해야 할일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병장 한 5호봉 되고나서, 아무것도 할일이 없어지면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면서 글 쓰는거 외에는 하는게 없습니다. 참고로 저희 대대 규정상 사무실에서 책 보는 것은 금지입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막내들이 해야할 일을 좀 줄여주자는 겸, 세절한 종이 봉지 비워주고오고 청소 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해주고 막내가 커피 잔 닦는 동안 저는 얼음 좀 채워주고 간부님 오시면 커피 타드리고 하다보니 시간도 잘 가고 막내들이랑 사이도 좋아지고 괜찮아졌습니다.

  잡일도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던 '시간'제거 였습니다.






[일기]

  일기 쓴다는것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귀찮은 것 중에 하나 이긴한데, 나중에 혹여나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기억력 조차 퇴색했을 때, 내 20대는 어떻게 살았나?라는 생각을 할 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가정하에 그 때를 대비할 겸, 손으로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날의 날씨는 어떠하였고, 그날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은 누구였으며, 나에게 하루 기분 좋게 해준 사람은 누구였는지, 그런것을 기억할 겸, 그리고 화나게 했던 그 사람을 어떻게 잘 넘겼는지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내가 결혼한다는 가정하에 내가 아들이 생겨서 군대에 보내야 되는 일이 생겼을 때, 화가 잘 주체 안 되던 20대에 나는 이렇게 잘 넘겼었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작성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 한번 살고 죽는데, 내가 살아왔던 기록이 남지 않은 채 그냥 슥하고 사라지면 뭔가 쓸쓸할것 같아서 작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일기를 작성하니 50분이라는 시간이 금방 사라지덥디다. 





[식물 키우기 : Plant vs Zombie]

  생활관에 선인장 하나, 집에 선인장 하나 키우고 있습니다. 원래는 동물을 키우고 싶긴한데 부모님께서 털 날리는 걸 싫어하셔서 안타깝게도 동물을 키우진 못하고 있습니다. 휴가 때 동대문 가서 선인장 작은걸 2개 사왔습니다.
  선인장이 당장 무럭무럭 자라나는걸 보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물을 주면 어느새 또 조금씩 자라있는걸 보면 의외로 뿌듯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자꾸 선인장의 가시를 뽑는겁니다. 물론 가시 때문에 찔리면 많이 아프기 때문에 위험요소를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그 가시를 뽑는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저에게는 말도 없이 이 가시들을 뽑는다는게, 제 마음 속에 담겨 있는 희망을 하나씩 뽑아 가는거처럼, 저에게는 너무나도 크나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선인장 가시는 잎이 퇴화되어 생긴 것으로 수분의 증산을 막기 위해 수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선인장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 이 가시들은 하나씩 뽑는다니, 그 가시를 뽑는 누군가는 저에게 눈엣가시이자 마치 'Plant vs. Zombie'게임에 나오는 좀비같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가장 주된 이유가 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군대라는 상황 자체가 통제 되어있는 상황이다보니, 당연히 핸드폰도 사용 못하고, 게임도 내 맘대로 하질 못합니다. 당연히 사람은 뭔가 자신이 관심있는 소재를 찾게되고 자연스레 그 소재는 주변에 널리고 널린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평상시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신경을 쓰게 되고 '누가 어긋나게 행동한다' '누가 노답이다' '누구는 일 잘하는데 쟤는 왜 저렇게 하는지 모르곘다'라는 험담을 하게 되고 이어서 꼽질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적지 않은 수의 군인들이 그랬습니다. 저 만큼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20년 이상을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 조차도 바꾸지 못한 친구를 내가 험담한다고 해서 그 친구가 과연 개과천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관심사를 식물로 돌렸습니다. 식물로 관심을 돌리고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 좀비 같은 존재만 뺀다면 말입니다. 식물은 말썽 부리지 않습니다. 내가 물 주는대로 자라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선후임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분이라면 정말 추천하는 취미생활 중 하나입니다.





[흡연]

  흡연은 절대적으로 악입니다. 흡연을 해오지 않으신 분에게는 절대로 권장하지 않는 취미 중 하나 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딜 가서든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흡연은 그저 죄악입니다. 

  그러나, 저는 군대의 흡연장에 있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험담이라는게 아쉽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데에 정말 유용한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비흡연자 분들은 화가 많이 나실 일이겠지만, 저에게 흡연이란 시간을 죽이는 좋은 도구였습니다. 흡연을 하면 사무실에서 내려가는데 최소 5분 나가서 담배 피는 동안 5~10분, 다 피고 나서 같이 피는 사람이랑 이야기 하는데 15분 올라는데 5분. 최소 30분을 죽이고 들어옵니다. 그 동안 일하는 사람은 제가 없는 동안 혼자 일을 하게 되겠지만 일~상병 때 선임 때문에 너무 괴로웠던 저에게 흡연이란 30분간 허락된 천국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담배를 피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쪼록 2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힘들면서도 재밌게 보낼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집에서 늘 응원해주시던 부모님, 그리고 사무실에서 내 뒷바라지 다 해주면서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라고 24/7 커버 쳐주던 제 후임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 군 생활 아무 탈 없이, 선후임 간 서로 웃으며 행복하게만 지내다가 무사 전역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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