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나홀로 독고다이의 길을 걸었던 아이돌 덕후의 저녁



[난 죽어도 군대 안 간다]

'나 군대 안갈건데?'

  내가 대학교 1학년 새내기 생활을 하면서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던 말이다. 주위의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10년 안에 통일 되겠지. 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징병제 사라지겠지. 아 몰라 그냥 안가'


하며 선을 긋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근거도 없이 말같지도 않은 마인드를 갖고 살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왜 군대에 가서 21개월이라는 시간을 바쳐야하지?' 이런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평소에도 비판적이고 반항적이고 모두가 YES를 외칠 때 혼자 NO를 외치는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대학 동기, 초중고 친구들도 전부 나를 보고 '쟤는 끝까지 군대 안 갈 녀석이다'라는 말을 했다. 나도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과 달랐고, 문든 정신을 차려보니 하나둘씩 국방부에 납치되기 시작했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고,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군지원을 했다. 합격이 되고나서 SNS에 군대를 간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 날이 4월 1일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훈련소 주소가 올라오고 나서야 군대 간 사실을 믿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까지 나는 내 신념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겁쟁이에 불과했다.






[세상엔 좋은 사람 참 많구나]

'고맙습니다'



  훈련소에 도착해서도 나는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척 했다.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심은 아버지의 눈가의 이슬 앞에서 한순간 무너졌다. 항상 커다란 존재였고 근엄하셨던 아버지. 살면서 자식 앞에서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아버지가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참아야 한다는 이성의 끈은 끊어졌고 나의 눈물샘도 터져버렸다.


  훈련병 모두가 부모님께 절을 할 때도 혼자 우뚝 서서 부모님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현장에서도 마이웨이를 달리는 철없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뒤로하고 전천후로 들어가서야 내가 정말 입대를 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여러 가지 절차를 마치고 나는 소대에 배정 되었다. 낡은 체련복을 입고 머리를 밀고 평상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약 스무 명의 머대리들. 한 내무반에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20명의 사람이 그 모양으로 앉아서 어색함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편하고 화가 났다. 내가 왜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불평과 불만이 내 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다들 나와 같을 법한데, 이상하게도 호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서로 말을 걸고 이야기도 하며 어느새 다 같이 웃으며 친해져있었다. 힘든 일도 미루거나 마다하지 않고 모두가 열심이었다. 그런 호실 사람들을 보며 느꼈다. 훈련소에서 만큼은 나도 긍정적으로 열심히 지내야겠다고.


  아 화생방에서만큼은 지키지 못했다. 지킬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를 변화시켜준 호실 사람들의 친절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총기분해조립이 서툴던 나를 옆에서 도와준 동기도 있었고, 야간 긴급소집 때 자기는 준비 다 됐는데 나가지 않고 나의 군장 싸는 걸 도와준 소대근무도 있었다. 열이 펄펄 끓어 의무대에 실려가 불침번을 서지 못한 나의 불침번을 대신 서준 동기도 있었다.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친절을 받았던 기억이 남는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다.







[처음 접한 아이돌]

'아이돌 같은 거 관심 없어'


  훈련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행군을 하는 날이 되었다. 무거운 군장을 메고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4월 18일 입대였고 행군은 5월이 넘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트와이스'라는 걸그룹이 'Cheer Up'이라는 노래로 활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교회와 성당 앞을 행군하며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침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던 우리들은 너나 할것 없이 그 노래에 홀린 듯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그 앞은 정체구간이 되었다. 사회에서 평소 관심 하나도 없던 아이돌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노래가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관심은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까지 이어졌다.


  매일 'Cheer Up' 무대를 보며 TV로 '트와이스의 우아한 사생활'이라는 리얼리티를 보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 떄마다 원래 트와이스 혹은 아이돌을 좋아했는지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같았다.


'밖에서는 음악방송 한 번 본적이 없었는데....'

'아이돌이 뭔지도 몰랐어'

 
  모두 군대에 와서야 존재를 알게 된 것이었다.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노래가 좋아서인지 아이돌이 이뻐서인지 전자인지 후자인지 상관 없었다. 다만 그 덕분에 훈련소, 자대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삶의 낙]

'정말 너무 힘들다'


  자대 배치를 받으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었다. 훈련소에서 겨우 적응하나 싶었던 병영생활은 리셋되고 처음 보는 100명의 병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터에도 선임들이 있고 일과가 끝나서도 오전 오후 내도록 보던 선임들이 있었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었다.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매일 잠에서 10번도 넘게 깨고 군생활의 낙도 없었던 나에게 레드벨벳이 찾아왔다.


'으 덕후 새X 염병하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빨리 좌측 상단의 화살표를 누르길 바란다. 아무튼 일말의 과장 없이 말 그대로였다. 당시 레드벨벳은 9월에 'Russian Roulette'이라는 곡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예능에서도 종종 등장했다. 나는 레드벨벳이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었고, TV에서 노래가 나오는 걸 들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면가왕을 보고 있는데 슬기라는 아이돌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무대를 내려갈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소감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 시작을 하자마자 얘가 막 울면서 성대결절, 부모님 이야기, 연습생 시절 등 슬픈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특히 누가 우는 걸 정말 싫어했다. 특히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울면 괜히 감성팔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기한테 감정이입이 되고 괜히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연습생 시절을 겪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대결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슬기가 우는 모습에 왜 동요가 되는 건지, 그날부로 슬기한테 입덕하고 그에 따라 레드벨벳이 어떤 그룹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결론이 뭐요]

'아 지금부터가 진짱비니다'

  사실 지금까지 쓴 위의 글들은 내가 겪은 개인적인 일들에 불과하다. 여러분들이 읽지 않고 넘어가도 무관하다. 다만 내 나름대로의 군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과 말하고 싶은건 이거다.


'하고 싶었던 것 혹은 좋아하는것에 미친 듯이 몰두해보자


  모든 병사들에게 해당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군생활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무언의 압박에 시달린다.


'자격증 하나라도 따 놓아야 한다'


'틈틈이 공부해야한다'


'회화/영어/일본어 외국어 실력을 키워놓자'


  이러한 말들은 결국 '군생활 중 뭐 하나라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배움에 관한 것들이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든다. 다들 사회에서 일하다가,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 수능치고, 대학교에서 수업 듣다가 입대했는데 군대에 와서까지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 물론 공부하는게 가장 큰 즐거움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미리 배워두고 가면 사회 나가서 어떻게든 도움이 될것이라는 말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군대에 있는 시간만큼은 뒷일 생각하지 않고 원하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냈으면 한다. 당연히 자신이 맡은 일은 할줄은 알아야 하지만.


  얼마 전 전역했던 친한 형에게 SNS로 메시지가 왔다.


'전역하니까 자유가 있어서 좋기는 한데, 공부해야 될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너무 힘들다. 그래서 어쩔 때는 생각 없이 군대에 있었을 때가 좋았던거 같아'


  지금 군대에 있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미친거 아니야?'할 수도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미 밖은 전쟁터다. 학업에 시달리고 취업에 매이고 생활고에 치여서 어쩔 수 없이 전역을 하고나면 공부해야 하고 일해야 한다. 거기서 잠시라도 벗어나 하나의 취미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또 언제 찾아올까?


  그래서 내가 선택하고 빠졌던 건 아이돌이다. 사람들이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군대에서 상당수의 병사들이 아이돌을 좋아한다. 엄청나게 많은 병사들이 참여했던 '아이돌 월드컵'만 봐도 군대에서 아이돌이 가진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병사에게 좋아하는 아이돌 이름 한명씩 이야기해보라고 말하면 끝도 없이 나열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1년 반 동안 덕질을 하면



'한심해 보인다'

'니가 그런다고 걔들이 알아주냐?'


라는 말들을 듣는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 좋아하는게 아닌데 말이다. 자기가 행복하고 만족하면 거기서 그만이다. 나는 아이돌 덕질을 하면서 정말 행복했다. 힘든 훈련이 있어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도 언제나 비타민이 되어줬다.

 


  비단 아이돌이 아니라도 뭐든 좋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드라마들을 몰아서 봐도 되고, 독서를 하거나 글을 써도 좋고 운동을 하면서 몸을 키워도 좋다. 피아노, 기타 등 악기 연주도 있고 패션, 스포츠, 게임 등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꾸준히 알아보는 것도 좋다.


  단, 만 자는 일만큼은 지양해줬으면 한다. 잠은 정말 자도자도 만족이 없다. 남는 것도 없고..... 아무튼 그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복잡하게 머리 쓰고 고민할 필요없는 여기 시간을 보내면서 군생활 무사히 마무리하길 바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