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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찔이가 아니라 래퍼라구욧' 랩퍼 영웅의 저녁

[시간]

'시간은 비역학적이다' by 스티븐 호킹

 공군의 복무 기간은 총 2년, 즉 24개월입니다. 짧다면 짧게 느껴질 수도 있고, 길다면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시간 속에서 제가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던 애썼던 단 한가지 사실은 ‘시간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릴 적 저에게 꿈을 주었던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자 공리인데, 저는 문과생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 문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특기는 헌병이었습니다. 헌병 특기를 받은 기훈단 강당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 당시 여름 군번이었기 때문에 특기 번호를 보자마자 착용하고 있던 짧은 체련복을 이마 끝까지 뒤집어 쓰고 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당시 제 옆에 있던 호실 동기들은 아직도 그 장면으로 저를 놀리곤 합니다. 네, 솔직히 너무 싫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저는 편하고 싶어서 공군에 왔습니다. 개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다고 해서 공군에 지원하게 되었고 다른 육,해군과 해병대보다 악습과 폐습이 거의 없다는 신사적인 이미지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헌병이라는 특기는 사형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오랜 시간동안 서있어 본 적이 없고, 평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서있다가는 발과 무릎이 너무 아파 잠에 들 수도 없었습니다. 전역을 한 달 앞 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헌병이라는 특기는 저에게 ‘시간’ 그 자체였습니다. 한 번도 오랜 시간동안 서있어 본 적 없던 저는, 살면서 이렇게 많은 시간동안 서있어 본 적이 처음이었고, 많은 것을 깨닫고 자신과의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저는 한번도 자기 자신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것입니다.






[꿈]

나도 할 수 있는데..

 누구에게나 마음 속 간직하고 있는 꿈이 있을겁니다. 첫 번째 키워드가 ‘시간’이었다면, 그 시간 속에서 제가 찾아낸 가장 값진 보석은 꿈입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다가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어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일본어 통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아버지께서는 국어를 전공하셨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과 흥미가 있는 것, 이 두가지의 교차점에 서 있던 전공이 바로 스페인어라고 생각을 하여 저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스페인어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듯, 저도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꿈은 바로 랩퍼입니다. 이 부분에서 실소를 머금으실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랩퍼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연도로 보자면 2008년부터 랩퍼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제가 사는 곳은 조용한 시골입니다. 그 시골의 아이들은 PC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노는 것 보다 자신들의 노래를 만들고 곰녹음기로 녹음하는 것이 더 재밌었고, 친하지 않던 중학교 친구들은 힙합이라는 음악 안에 모여 돈독해졌습니다. 비록 이마트에서 산 3천원짜리 SOMIC 마이크라고 할지라도, 저희에게는 유일한 놀이기구였고, 유일한 취미였다고 보면 됩니다.


 꿈을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입대 전 저도 마찬가지였고, 가정 형편때문에 공부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저는 기숙형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모든 음악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그 때 친구들과는 땔래야 뗄 수 없는 친구로 남았지만, 더 이상 학교를 마친 후 서로의 집에 모여 음악을 할 수 없는 현실이 제 앞에 있었습니다. 변명하기 싫지만, 저는 타협했고 나름 괜찮은 학업성취를 이루고 대학교에 진학하는걸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수군대던 음악이 유명해져 있었습니다. TV에서는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음원 차트에도 여러 랩퍼들의 이름이 올라왔습니다. 옛날 옛적 우리끼리만 열광하던, 그 작고 소중했던 음악이 이제는 멋지게 날개를 핀 채 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꿈을 꿈으로만 남겨야만 했습니다. 스무살이 넘은 청년에게 음악은 추억이 되버렸고, 자기 전 담배 한 대를 태우며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저는 쇼미더머니를 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은 단 하나 ‘나도 할 수 있는데..’라는 푸념이었습니다.






[힘]

‘역경을 이겨내고 핀 꽃이 제일 아름다운 꽃이니라’ from 뮬란

 꿈을 꿈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가 아닙니다. 저에게 정말로 힘이 되어준 것은 친구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들은 사회의 친구들, 군대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그들은 제 음악이 다시 꽃 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다시 랩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북 돋아주었고, 비난 아닌 비판적 관점으로 저의 작업물들을 귀 기울여 들어줬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저는 푸념만 늘어놓는 실패자인 채로 살아왔을겁니다.


 군대에서 저는 앞서 말했던 동네 친구들과 크루를 재결성했습니다. 처음 크루를 만들었던 때가 2008년이니, 올해가 되며 10주년을 맞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휴가를 나갈 때 마다 음악 작업을 했고, 복귀를 하면 근무 외 시간은 전부 음악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제 목표는 단 한 가지입니다. 힘들고 우울했던 청소년 시절,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음악이었고 특히나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이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빈지노, 버벌진트는 제 인생에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웅들이 되었고, 저도 그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와 제 친구들처럼 시골 마을에 사는 다른 아이들에게 저희 노래가 영감이 되어, 하고 싶은것들,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전부 이룰 수 있는 힘을 마음속에 갖게 하는것이 목표입니다. 돈이나 명예, 유명세는 단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명이라도 제 음악을 듣고 생각에 잠긴다면 제 목표는 벌써 이룬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꿈이 꿈으로 남는 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모두들 함께 타고 가고 있는 기차에 계속 타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끝없이 고뇌하고 자문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그 기차에서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년 휴학을 할 다짐을 했을 때 어머니께 이 말씀을 드리고 이어졌던 침묵은 제게 잘 갈아진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노력할 것이고, 여러분들은 지금 위대한 랩퍼가 될 사람의 전역 일기를 보는 셈입니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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